1990년 내한해 30년째 사역…"고통받는 사람들은 부활한 예수의 상처"
"노숙자 늘린다고 욕도 먹었죠"…새집 입주 이어 동백장 수훈 겹경사

(성남=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부활대축일(4월 21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5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마지로의 안나의 집에서는 여느 때처럼 저녁식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월∼토요일 오후 4시 30분부터 7시까지 운영되는 이곳 지하 1층의 노숙인 급식소에서는 하루 평균 550명이 주린 배를 채우며 위안을 얻는다.

1층 사무실에서 안나의 집 원장 김하종(62) 신부를 찾았더니 로만 칼라의 사제복 대신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서양인이 유창한 우리말로 반갑게 맞는다. 사무실에는 원장실이 따로 없고 원장도 직원과 같은 크기의 책상을 쓰고 있다, 회의실에 걸린 조직도에도 막내 직원의 사진과 이름이 맨 위를 차지하고 있고 원장의 사진과 이름은 맨 아래에 붙어 있다. 봉사자를 자처하는 김 신부의 성품이 잘 드러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과 발, 옆구리에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입은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계시는지는 잘 몰라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다는 건 확신합니다. 지금 이 땅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 아픈 사람, 버림받은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상처입니다. 저는 이분들을 위해 봉사하며 매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부활절의 의미를 설명하는 김 신부의 표정에서는 자신감이 넘치고 말투에서도 활력이 느껴진다. IMF 금융위기 직후인 1998년 문을 연 안나의 집은 20년 셋방살이를 마치고 지상 4층, 지하 1층 규모의 새집을 지어 지난해 9월 1일 입주했다. 노숙인 급식소와 함께 노숙인 자활시설, 청소년 쉼터, 공동생활가정, 청소년 자립관이 들어서 있다.

요일별로 법률 상담, 진료, 이·미용, 옷 나누기, 취업 상담, 인문학 강좌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가 하면 이동형 봉사차량 '아지트'(아이들을 지켜주는 트럭)를 이용해 '찾아가는 상담·교육·긴급구호 서비스'도 펼치고 있다.

그의 헌신과 봉사를 기려 지난 2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 추천을 거쳐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이에 앞서 포니정혁신상(2018년), 올해의 이민자상(2015년), 호암상(2014년) 등도 받았다. KBS 1TV의 '이웃집 찰스'(2016년)와 '인간극장'(2017년)에도 그의 사연이 소개됐고, 국제이주기구(IOM) 한국대표부는 2017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이환권이 제작한 그의 조각상을 설치하기도 했다.

"모든 게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성남동성당 창고에서 급식을 시작했다가 몰려드는 사람 때문에 장소가 비좁아 난감해하자 인근 뷔페식당 사장께서 돌아가신 어머니(세례명 안나)를 위해 뭔가 하고 싶다며 식당 한 층을 내줬죠. 쌀이 떨어져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는 누군가 쌀을 가득 실은 트럭을 보내줬습니다. 건물 계약이 끝나는 2018년이 다가오자 자포자기 상태였다가 뜻하지 않은 상을 받아 상금을 보태고 방송을 보신 분들이 너도나도 후원금을 보내줘 새 건물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저야 은퇴하면 그만이지만 이곳에서 따뜻한 밥 한 끼로 허기를 달래던 분들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보살펴주신 덕분이죠."

2017년 12월 5부작 다큐멘터리 시리즈 '인간극장-신부님, 산타 신부님'이 전파를 타자 가슴 뭉클한 시청자들의 기부 행렬이 이어졌다. 결혼 패물을 판 돈을 들고 온 아주머니, 첫 월급을 선뜻 기부한 스무 살 아가씨, 신혼여행을 취소하고 경비 500만 원을 내고 간 신혼부부, 매달 무료로 노숙인 이불 빨래를 해주겠다고 약속한 세탁소 주인, 감자 다섯 가마니를 보내온 강원도 농부…. '인간극장'을 연출한 PD와 내레이션을 맡은 성우도 후원금 대열에 동참했다.

"밥 한 끼를 나누는 배려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저는 후원자들에게 한 달에 한 사람이 먹을 밥 한 끼(5천 원)만 도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돈이 없으면 다른 재능이라도 나누면 되죠. 형편이 어려우면서도 남을 돕겠다고 나서주신 후원자 덕분에 지금까지 왔습니다."

이제 집 걱정은 없어졌지만 살림 규모가 늘어 씀씀이도 커졌다고 한다. 주일마다 인근 성당을 돌며 도움을 호소하고 틈나는 대로 후원자를 만난다.

본명이 빈첸시오 보르도인 김하종 신부는 이탈리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심한 난독증(難讀症) 때문에 열등감에 빠졌고 남들보다 몇 곱절의 노력을 쏟아야 했다. 장애를 어렵게 극복하며 "고통은 하느님께서 내리신 시험이 아니라 기회이자 은총임을 느꼈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은 뒤 자신처럼 고통을 겪는 사람을 돕는 데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선물 받은 타고르 시집을 읽고 매료돼 로마 우르바니아나대에서 신학과 함께 동양철학을 전공하고 그레고리오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타고르를 통해 간디와 불교를 알게 되고 동양철학을 공부하다가 한국의 천주교 전래 역사도 접하게 됐다.

"선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 한국 천주교 역사에 감동했습니다. 1987년 사제품을 받고 한국행을 준비해 1990년 5월 12일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며 '이제 한국이 내 조국이고 한국인이 내 민족이다'라고 다짐했죠.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는 한국에 돌아가면 죽는 줄 알면서도 귀국해 순교했습니다. 그분의 성을 따르고 이름은 하느님의 종을 줄여 '김하종'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는 서강대 한국어교육원을 다닌 뒤 성남시에 어려운 사람이 많이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성남 신흥동성당 보좌신부로 일하며 상대원동 달동네에 봉사하러 다녔다. 홀몸노인을 상대로 무료 급식을 펼치고 소년소녀 가장의 집을 방문해 공부방을 운영했다. 1998년 안나의 집을 열고 본격적으로 노숙인 급식을 시작하자 "김 신부 때문에 노숙인이 늘어난다"는 비난의 소리가 들려왔다.

"장애인 시설 때문에 장애인이 생겨나는 게 아니듯이 노숙인 시설 때문에 노숙인이 늘어나는 게 아닙니다. 노숙인이 있으니 노숙인 시설이 필요한 거죠. 열매와 뿌리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노숙인을 상담해보면 심리, 성격, 정신질환, 알코올의존증, 신체 장애 등의 문제가 있어서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겁니다.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자립하도록 도와야죠."

김 신부가 처음 한국에 올 때만 해도 외국인이 드물어 거리를 지나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수군대기 일쑤였다. 처음엔 수염을 길렀는데, 식당에서 한 어르신이 "젊은 친구가 버릇없게 수염을 기른다"고 말해 당장 깎았다고 한다. 한국의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문화와 언어가 달라 혼란과 오해는 많이 겪었지만 무시당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전 서양인이고 백인이었으니까요. 흑인이나 동남아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차별하거나 박대받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그는 2015년 특별귀화를 통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헌신적인 봉사활동으로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그 전에 일반귀화를 신청했다가 두 차례나 심사에서 탈락했다. 한국인과 결혼했거나 한국에서 사업하는 사람에게 유리한 규정이 독신 사제에게는 높은 벽이 된 것이다.

"이제는 모든 인류가 촘촘한 그물망으로 엮여 있습니다. 지구상 어떤 나라도 옛날처럼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처럼 장벽을 치려 하거나 영국처럼 유럽연합(EU)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시도는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응답이 필요합니다."

김 신부는 한국 땅을 밟을 때부터 이 땅에 뼈를 묻기로 결심하고 이미 시신과 장기 기증 서약도 마쳤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묻자 "나는 봉사자일 뿐"이라며 몸을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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