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戰 적수-혈맹 관계서 경제·전략적 파트너로 관계회복
베트남 총리 "전쟁 상흔 간직한 베트남, 회담 주최 의무감 느껴"

(하노이=연합뉴스) 특별취재단 = 27일 막이 오르는 2차 북미정상회담은 회담이 열리는 장소의 상징성 면에서는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정상회담 때보다 훨씬 더 이목을 끈다.

싱가포르의 경우 수십년간 극한의 적대 관계를 이어왔던 북미 두 나라의 현직 지도자가 사상 처음으로 마주 앉는 자리였던 만큼 무엇보다 '중립지대'로서의 역할이 부각됐었다.

'적대적' 지도자의 '첫 만남'이라는 키워드에 맞춰 군사·안보·외교 등의 측면에서 어느 한쪽에 무게추가 기울지 않는 제3의 지대라는 점이 회담 장소 선정에 있어서 가장 큰 요소가 됐다는 평가다.

하지만 두번째 회담 장소로 낙점된 베트남 하노이는 과거 냉전의 상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대표적 장소라는 점에서 북미 양국이 과거의 상처를 딛고 본격적인 '해빙'의 장을 열겠다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 미국과 북한, 베트남 3국의 그간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러한 상징성이 그대로 읽힌다.

미국과 베트남은 냉전 시대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손꼽히는 베트남전(1964∼1975)을 거치면서 적대 관계가 됐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강력한 반전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던 당시 전쟁으로 인해 200만명의 민간인과 110만명의 북베트남 군인, 베트콩이 사망했다.

특히 1972년 12월18일 미군이 B-52 폭격기를 동원해 개시한 '크리스마스 대공습'으로 하노이는 폐허가 됐다.

CNN은 공군 관계자의 표현을 빌려 당시 공습이 '공군력 역사에서 가장 큰 작전'이었으며, 폭격의 목적은 '세계에서 가장 요새화된 도시였던 하노이를 폭파하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당시 미국은 700번이나 B-52 폭격기를 출격시켰고 1만5천t의 폭탄을 퍼부어 하노이에서만 1천300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냈다.

하지만 양국은 인도차이나반도에서의 중국 영향력 견제, 국제적 고립탈피 및 경제재건 등의 목적으로 관계 개선을 시도했고, 1995년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적대 관계 청산에 나섰다.

이후 양국의 교역 액수는 4억5천만 달러에서 600억 달러로 급성장했다. 1954년 5만3천명에 불과했던 하노이의 인구 역시 700만명 이상으로 불어나는 등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개발도상국으로 떠올랐다.

미국 입장에서는 아시아 안보 전략뿐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베트남이 매력적 파트너로 변모한 것이자, 적대관계라는 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된 것이다.

미국이 애초부터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에 나서면서 비핵화의 상응 대가로 경제적 보상을 약속하면서 베트남 모델을 종종 거론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반면 북한과 베트남은 베트남전쟁을 치르면서 '혈맹'으로 격상된 관계다.

1950년 1월 수교한 북한과 베트남은 1957년 호찌민 베트남 주석의 방북과 이듬해 김일성 주석의 베트남 방문 등을 계기로 '동지적 관계'를 수립했다.

1967년에는 양국이 무상군사지원 및 경제원조 협정을 체결했고, 베트남전쟁 때 북한이 공군 병력을 파견하고 군수물자를 지원하면서 피를 나눈 '혈맹'으로 발전했다.

또 베트남도 공산당 일당체제를 유지하고 베트남전 이후 반미 기조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북한에는 '사회주의 형제국가'나 다름없었다.

베트남전쟁 직후 북한의 원조가 베트남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당시 베트남보다 경제사정이 나았던 북한은 전쟁 직후인 1978년 하노이에 '베트남-북한 우정 유치원'을 지어줬다. 유아들의 낮잠을 위한 매트리스와 담요는 물론 수저, 식기까지 북한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북한 우정 유치원의 전 원장이었던 호앙 티 탄은 뉴욕타임스(NYT)에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 우린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북한의 지원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베트남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의 친(親) 중국 정권을 침공하자 북한이 베트남을 비난하면서 관계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경제위기에 직면한 베트남이 1986년 개혁·개방정책인 '도이머이(쇄신)를 채택하고 1992년 한국과 수교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 멀어졌다.

1995년 베트남이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북한과 베트남은 형식적 우호 관계만 유지할 정도로 사이가 벌어졌으나 김정일 집권 시기인 2000년대 들어서면서 양국은 관계 회복을 시도해왔다.

베트남 정부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따른 '책임감'과 '의무'가 이번 정상회담의 장소를 제공하기로 결정한 가장 큰 계기가 됐다고 밝히고 있다.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는 26일 보도된 CNN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전쟁의 상흔을 안고 있는 베트남의 역사가 회담 장소 결정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됐다면서 "한반도 화해와 평화 구축을 향한 역사적 순간에 (회담을 주최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약속이자 우리의 의무"라고 말했다.

베트남식 경제 개혁·개방 모델을 북한이 어느정도 '벤치마킹'할 지는 미지수이지만, 이번 회담 개최를 고리로 양국관계는 양적 또는 질적 측면에서 크게 격상될 가능성이 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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